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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
해인사
원당암 부근에 홍제암이 있습니다.
홍제암(弘濟庵)은 사명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암자의 이름도 사명대사가 입적한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라는 시호에서 따온 것입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해인사에서
입적했습니다. 사후에 사명대사 영정을 홍제암에 모셨고, 사명대사 부도와 비도 이곳에 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홍제암 입구에 조성된 부도밭에
있습니다.
- 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
비의 전체 높이는 3.15m이며, 앞면 윗부분에 '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
석장비명(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石藏碑銘)'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으로 사명대사 부도에 딸린 탑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문 끝에 "만력
40년 12월립(萬曆四十年十二月立)"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광해군 4년(1612년) 12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비신을 보면, '십(十)'자로 길게 금이 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에 의해 파손된 흔적입니다. 비신은 파손된 뒤 한 조각은 해인사 내 경찰주재소 정문 디딤돌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조각들은 해인사
구광루와 명월당 앞에 보란 듯이 내버려두었습니다. 파괴된 비신이 복원된 것은 1958년입니다. 그때 깨어진 탑신을 붙였던 흔적이 이렇게 남은
것입니다.
- 사명대사 석장비의
뒷모습
그런데 더 기가 막힐 일이 있습니다.
비신 파괴를
부추긴 사람이 다름 아닌 당시 해인사 주지 변설호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온갖 친일행각을 벌인 그는 비의 내용을 문제 삼아 다케우라 서장에게 비를
부숴버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런 그는 해방 이듬해에 승권이 박탈되어 절에서 쫓겨났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지요.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세상은 여전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그와 같은 사람이 없다고 자신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 안내판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안내판입니다.
이 안내판에서 부도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눈여겨보십시오. 부도는 3단의 연화대좌와 종모양의 탑신, 둔중한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명에 맞는 부도가 어느 것인지 부도밭에서
찾아보았습니다.
- 환적당
지경탑
그래서 위 사진의 부도가 사명대사 부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도는 사명대사
부도가 아니라 환적당 지경탑(幻寂堂 智鏡塔)입니다.
안내판의 설명이 얼마나 엉망인지 이곳에서도 또 한 번 느끼게 됩니다. 해인사와 같은 큰 절에서, 그것도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임에도 사정은 이렇습니다.
-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사진 출처: 한국의
사찰 문화재)
사명대사 부도는 홍제암에서 북동쪽으로 약 20m쯤 되는 산기슭에 있습니다. 위 사진의
부도가 사명대사 부도입니다. 안내판의 설명과 얼마나 일치하나요?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부도는 석종형 부도로, 기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기단 아래쪽은 네모꼴이고, 기단
위쪽은 둥근
꼴인데, 맨 윗면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은 높이 1.7m, 너비 1m의 규모로, 석종형 부도로는 큰 편에 속할 뿐 아니라 당당한
형태를 지녔습니다. 부도 정상에는 보주가 놓여 있는데, 옆면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석장비 비문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1610년 8월 26일에 해인사에서 입적하였고, 그 후 11월 20일에 문도들에 의해 화장되었습니다. 이때
정주(頂珠) 1과를 얻어 석종을 다듬어 안장하고, 부도를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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