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왼쪽)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오른쪽)
김지성이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조성하였습니다. 그는 상사(尙舍)와 집사부시중(執事部侍郎)을 역임한 후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살면서 부모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당시 이 불상은 모셔졌습니다.
광배 뒷면에 명문이 있습니다. 그 명문의 끝 부분에 성덕왕 19년(720년)에 김지성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성덕왕 18년(719년)에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보살상을 조성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자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갖춘 완전한
형태입니다.
떡 벌어진 가슴과 팽팽한 어깨, 당당하게 버티고 선 모습에서 위엄과 강건함이 서려 있습니다. 법의는 통견으로,
넓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 위로 몸에 밀착되어 있어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옷 주름은 U자형으로 상체에서 부드럽게 흐르다가 다시 양쪽 다리로 각각
흘러내렸습니다.
- 세부
광배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형의
거신광배입니다. 두광과 신광은 세 줄의 선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두광과 신광의 선과 선 사이에 다양한 꽃무늬가
있으며, 가장자리에 불꽃무늬가 있습니다.
나발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육계가 있고, 얼굴은 풍만하며, 눈·코·입이
뚜렷합니다. 오른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습니다.
- 세부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렸으며, 손가락을 약간 구부렸습니다.
- 세부
대좌는 안상이
음각된 팔각대석과 그 위에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앙련과 복련을 한 번 보시죠. 그 표현한 방식이
서로 판이합니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는 서로 같은 데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데 잘 보면 앙련이 새겨진 돌과 복련이 새겨진 돌이 서로 다른 돌입니다.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단조로움을 피하려고 그랬을까요?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평왕릉은 가을비에 젖고... (0) | 2013.10.02 |
---|---|
황복사터 삼층석탑, 그리고 보문들 (0) | 2013.10.01 |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0) | 2013.09.27 |
황룡사터 금당터와 목탑터 (0) | 2013.09.26 |
진해 안골왜성 (0) | 2013.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