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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 치일리 인종태실
은해사에서 운부암과 백흥암 쪽으로 20여 분을 가다 보면, 저수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운부암과
백흥암으로 가는 길이 서로 갈라집니다.
이곳 갈라지는 길가에 인종대왕 태실을 알리는 작은 이정표가 있습니다. 이 이정표가 가리키는
쪽으로 산길을 800m쯤
오르면 능선에 인종태실이 있습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는 석실을 말합니다.
- 인종태실로 올라가는 산길
인종태실로 올라가는 산길입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때마침 길 양옆으로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 가봉비
인종태실의
가봉비(加封碑)입니다.
이수와 거북 모양을 한 비좌는 그대로이나, 비신은 새로
했습니다.
비신 앞면에는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가정 25년 5월
일건(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이라 새겨져 있었다. 가정 25년은 1546년을
말합니다.
- 가봉비의
이수
가봉비의 이수입니다. 구름 속을 나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 태실
태실의 모습입니다. 땅속에
태호(胎壺) 석함(石函)을 두고, 땅 위에는 앙련이
새겨진 사각형 기단석과 고복형 중동석(中童石), 그리고 팔각 지붕돌을 얹었습니다.
태호(胎壺) 석함(石函)에는 태항아리와 지석, 동전
등이 있었습니다. 태항아리는 외항아리와 내항아리로 되어 있었고, 지석에는 "1515년 2월 25일 오후 8시생 세자
호(峼)의 태를 1521년 1월 17일에 묻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 돌난간
돌난간
모습입니다.
- 태실 부재들
태실 주변 한곳에는 발굴 이후 나온 석재들과 당시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널려
있습니다.
- 인종태실
인종태실은 조선 12대 왕인 인종(仁宗, 1515~1545년)의 태를 봉안한 곳입니다. 중종
16년(1521년)에 처음 조성되었고, 인종이 죽고 난 후 명종 1년(1546년)에 가봉(加封)을 완료하였으며, 숙종 6년(1680년)에 보수가 있었습니다.
1928년에
일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명목을 내세워 54기의 태실을
경기도의 서삼릉으로 이봉하였습니다. 이곳의 태항아리와 지석 등도 그때 옮겨갔습니다. 이후 이곳은 방치되다시피 하였는데, 1999년 발굴조사 후 200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복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