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화유산

의령 백산 안희제 생가

sky_lover_ 2021. 7. 28. 11:55

- 멀리서 바라본 안희제 생가

 

의령(宜寧)은 경남의 가운데에 있습니다. 동서로도 남북으로도 중간에 있어 예부터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고,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이름난 부자가 태어난 곳입니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의 생가가 있고, 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희제의 생가도 있습니다.

 

안희제 생가는 입산(立山)마을에 있습니다. 이곳은 탐진안씨(耽津安氏) 집성촌으로, 종가가 있습니다. 탐진안씨 일가는 1600년 초 고승의 예언에 따라 길지인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입산마을은 뒤로는 장백산, 앞으로는 유곡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마을입니다. 하천과 마을 사이에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어 부자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백산은 마치 산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하여 '설뫼'라 불렸는데, 한자로 쓰면 '입산'(立山)입니다.

 

- 입산마을의 안희제 벽화

 

마을 담벼락에 안희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는 이곳 천석지기 집안에서 태어나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어 독립운동 자금을 대었습니다. 그는 백범(白凡) 김구(金九),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삼백(三白)으로 불립니다.

 

- 안희제 생가

 

안희제 생가입니다.

 

- 안희제 생가

 

생가는 사랑채와 안채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건물은 1944년 12월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996년 5월에 복원되었습니다. 이때 사랑채 지붕이 초가로 바뀌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초가 건물입니다. 마루, 여름용 방 1칸, 겨울용 온돌방 2칸이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에 마루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방이 필요한데도 별도의 건물을 두지 않고 한 건물 내에서 해결하였습니다.

 

- 안채

 

안채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입니다. 마루, 방, 2칸 대청, 방, 부엌이 있습니다.

 

- 안채

 

안채 모습입니다.

 

- 현판

 

안채 정면에 '백산고가'(白山古家)라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안희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는 한평생 사업가로서 살았습니다. 그는 사업가로서 얼마든지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사업은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창구 기능을 하였습니다.

그는 1885년 경남 의령 입산마을에서 천석지기 양반가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정의숙(養正義塾)에 다니던 1907년과 1908년 구국 계몽운동 목적으로 영남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교남학우회와 교남교육회에 참가해 활동하였습니다.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해야 함을 깨닫고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宜新學校)와 창남학교(刱南學校)를, 동래에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였습니다. 1909년 10월에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초대 부단장이 됐다가 이후 2대 단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1910년에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1911년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인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순보>를 발행하였습니다. 1911년에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한 결과 논 2천 마지기를 처분해 이를 자금원으로 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부산에 설립하였습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곤궁하게 살며 자금난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이 절실하다고 느껴 이를 돕기 위해 사업을 하여 자금을 대어 주고자 하였습니다.

백산상회는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개인 회사로 출발하였지만, 1919년에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하였습니다. 안희제는 최대 주주였지만, 사장으로 경주 출신의 대지주였던 최준을 앉히고 자신은 실질적인 경영보다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데 진력하였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습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서울, 대구, 인천, 원산 등 국내 열여덟 곳과 안동, 봉천, 길림 등 국외 세 곳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영업활동 지역의 확대라는 측면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정보 연락과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재정적 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백산무역이 부산의 최대 회사로 발돋움하고 민족기업으로 발전해가자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나, 독립운동 자금 전달 방식을 장부상 거래 형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일경에 적발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회사의 경영 성과와 상관없이 독립운동자금을 지속해서 전달하여 회사는 만년 적자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내부 임원 간의 갈등도 있어서 결국 1928년 1월에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1932년에 목단강 상류인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일대 토지를 사들였고, 이듬해에 이주해 드넓은 땅을 개간하여 농지를 조성하고 농민 300여 호를 이주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발해농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에 발해보통학교를 세워 스스로 교장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주가 이미 일본 수중에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의 의지가 관철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1942년 11월 19일에 신병치료차 고향에서 요양하던 중 체포되어 만주 목단강 경무청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1943년 9월 2일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곧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체포되기 전에 일기와 각종 자료를 모두 불태웠다고 합니다.

- 백산기념관

 

안희제의 자취가 남아 있는 부산에는 백산기념관이 있습니다. 이 기념관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