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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남원 신계리 마애불

sky_lover_ 2021. 2. 15. 13:36

- 마애불로 올라가는 입구

 

남원(南原) 신계리(新溪里)예전에 누에가 섶에 올라 집을 짓는 노잠등신(老蠶登薪)의 형국이라고 해서 섶갓 또는 신촌(薪村→新村)이라 하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계리로 불리던 마을과 합치면서 신촌과 월계의 이름을 따서 신계리가 되었습니다.

신계리 신촌마을 뒤편에 풍악산이 있습니다. 그 남동쪽 기슭에 신계리 마애불이 있습니다. 그곳
 임도(林道) 길가에 마애불로 가는 표시판이 있습니다.

 

- 마애불로 가는 산길

 

마애불은 표시판이 있는 곳에서 완만한 경사의 산길을 따라 한동안 올라간 곳에 있습니다. 표시판에는 마애불까지 50m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00m 남짓 됩니다.

 

- 신계리 마애불

 

마애불은 높은 언덕바지에 있습니다.

 

- 신계리 마애불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마애불 모습은 잠시 숨을 멎게 합니다.

 

- 신계리 마애불

 

마애불은 바위 면에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습니다. 높이가 3m 넘습니다.

 

- 부분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유난히 큼직하고, 표정은 원만하면서도 근엄합니다. 두 귀는 짧고 둥글고, 눈 코 입에는 생기가 넘칩니다.

 

- 부분

 

어깨가 넓고 가슴이 발달하였으나, 볼록한 어깨로 다소 어색합니다. 그렇지만 팔과 다리에 입체감이 살아있어 생동감이 있습니다.

 

- 부분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입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쳤습니다. 옷 주름은 평행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습니다.

 

- 부분

 

왼쪽 어깨에 걸친 옷 위로 옷자락 하나가 뒤로 걸쳐 있습니다.

 

- 부분

 

두 손은 배 앞에 두었습니다.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였고, 오른손은 손등을 보이며 셋째와 넷째 손가락을 안으로 굽혔습니다.

 

- 부분

 

광배는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두광에는 가운데에 연꽃무늬를, 테두리에 구슬 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신광 테두리에는 구슬 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슬 무늬는 그 예가 드문 특이한 것입니다.

 

- 부분

 

정좌(正坐)한 다리 아래로 옷자락이 흘러 내렸는데, 대좌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상현좌(裳懸座)를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정좌한 다리 바로 아래에 여러 개의 네모난 홈이 있습니다. 홈은 다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 속에 있고, 그 솜씨가 거칩니다. 이 홈은 마애불 조성 당시보다는 후대에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 신계리 마애불

 

마애불은 양감이 풍부한 얼굴 표현 등이 통일신라 후기 특징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풍만한 신체에 비하여 각 부분의 세부 표현은 간략화되었습니다. 조성 시기는 고려 시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신계리 마애불

 

마애불은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이러한 전설은 다음과 같은 전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원 고을을 지켜주던 용이 살았습니다. 그 용은 여의주와 뿔이 없는 교룡(蛟龍), 즉 이무기였습니다. 교룡은 평소에는 백성을 잘 돌보고 침략자들을 격퇴해주는 수호자로서 자신의 고을을 잘 지켜주지만, 여의주를 입에 물면 뿔이 나고 황룡이 되어 승천해 버립니다.

남원 고을 사람들은 교룡이 자손만대로 자신들의 고을을 지켜주기를 바라며 승천하지 못하도록 풍악산 아래에 있는 여의주 바위를 보이지 않도록 땅속에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대나무를 심지 못하게 했습니다. 죽순이 땅속에 숨어있는 여의주 바위를 밀어 올리면 용이 보고 입에 넣어 승천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좋은 땅을 찾아다니던 도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잠시 기도를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도사는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아오기 위해서 대나무 지팡이를 그곳에 꽂아두었습니다. 그 대나무 지팡이는 살아서 번성했고, 몇 년 후에는 많은 죽순이 올라오면서 땅속에 숨어 있던 여의주 바위를 밀어 올렸습니다.

고을 사람들은 황급히 도선국사를 찾아가 대책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의주 바위를 반으로 잘라 부처님을 모시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바위에 부처님을 모신 후 교룡은 승천하지 않고 어려울 때마다 남원 고을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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