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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슬산 도성암 삼층석탑
도성암(道成庵)은
주위 경관이 매우 빼어난 곳에 자리하였습니다.
이곳은 비슬산 정상 가까운 높은 곳으로, 예로부터 '천 사람이 도를 얻을 곳(千人得道地)'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경북 3대 참선 수도처 가운데
하나입니다. 1963년에 선방을 지으면서부터 선풍(禪風)을 드날리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도 여러
스님이 머물며 수도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 도성암 삼층석탑
이곳
대웅보전 앞마당 한가운데에 작고 예쁜 탑이 하나
있습니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 탑신부와 상륜부로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2층 탑신부까지만 있었는데, 지금은 상륜부까지 모두 갖추었습니다.
- 기단부
하층기단은 지대석의 2단 호각형 받침 위에놓여 있습니다. 면석에는
모서리기둥과 1개의 가운데기둥이 있습니다.
- 하대갑석의 물매
하대갑석
윗면에는 물매가 있고, 가운데에는 2단 호각형 받침이 있습니다.
- 도성암 삼층석탑
상층기단 면석에는 모서리기둥과 1개의 가운데기둥이 있습니다. 상대갑석 아랫면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물매와 3단 각호각형 받침이 있습니다.
탑신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몸돌 면석에는 모서리기둥이
있습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다소 굴곡이 있고, 전각에서 반전이 있습니다. 층급받침은 4단입니다.
- 도성암 삼층석탑
<삼국유사> '피은(避隱)' 편의 '포산이성(包山二聖)' 조에 도성암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라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포산(包山,
지금의 비슬산)에 숨어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여 리쯤 떨어졌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항상 서로 왕래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다. 관기가 도성을 부르고자 하면 이와 반대로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갔다. 이렇게 여러 해를 지냈다.
도성은 그가 사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서 늘 좌선(坐禪)을 하였는데, 어느 날 바위 사이로 삐쳐 나와서는 온몸을 허공에 날리면서 떠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혹 수창군(壽昌郡, 대구 수성(壽城))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聖師)의 이름으로 그 터를 명명(命名)했는데, 모두 유지(遺址)가 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 즉 982년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랑(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썼는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다. 향나무를 쪼개어 씻어서 발(箔) 위에 펼쳐 두면,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이다. 그는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산중에서 1,000명의 출세(出世)를 기다려 남은 과보(果報)를 받겠다고 서약했다.
이에 찬(讚)하여
말한다.
서로 지나가다 달빛을 밟으며 구름 어린 냇물을 희롱하던,
두 노인의 풍류는 몇백 년이 지났는가.
안개 자욱한
골짜기에는 고목만 남았는데,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찬 그림자 서로를 맞이하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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