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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강왕릉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7년 출판)
경주 남산 자락에는 신라시대 왕릉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신라 제49대 헌강왕릉과 제50대
정강왕릉도 있습니다. 이 두 왕릉은 서출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산 동쪽 자락에 있습니다.
위 사진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헌강왕릉의 모습입니다.
헌강왕은 경문왕의 맏아들로,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신라는 태평성세를
이루었습니다. 서라벌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를 정점으로 신라는 급속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꽃도 시들기 전에 가장 화려하고, 불꽃도 마지막 불꽃이 가장 밝다고 했던가요?
- 헌강왕릉
헌강왕릉의 최근 모습입니다. 헌강왕릉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원형봉토분입니다. 봉분 둘레에
호석으로 맨 아랫단에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요석(腰石)을 4단으로 쌓았습니다.
신라 왕릉의 호석 구조는 지대석, 요석, 갑석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갑석은 빗물이나 눈
녹은 물들이 갑석 지붕을 타고 호석 바깥쪽으로 흐르도록 하여 호석을 보호하고,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헌강왕릉에는
이러한 갑석이 없습니다. 신라
왕릉 양식으로서는 특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 정강왕릉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7년 출판)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정강왕릉의 모습입니다. 헌강왕릉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왕위에 올랐고, 이후로 신라는 급격히
무너져내렸습니다.
- 정강왕릉
정강왕릉은 헌강왕릉와 같은 형식의 무덤입니다.
횡혈식 석실분으로, 원형봉토분입니다. 요석을 2단으로 쌓았습니다.
정강왕릉에도
헌강왕릉에서처럼 갑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위덕대학교 이진락 교수는
원래 두 왕릉
모두에 갑석이
있었고, 요석도 3단이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 헌강왕릉은 3단 요석 구조였고, 그때까지도 갑석이 남아 있었으나, 그 이후에
4단으로 잘못 복원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정강왕릉도 세월이 흐르면서 갑석과 요석이 무너져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두
무덤은 오랫동안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고 있다가 조선 영조 때인 1730년 경주 김씨 문중에
의해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때 근거로 내세운 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헌강왕과 정강왕은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보리사가 지금의 보리사와 같은 절인지가
증명되지 않았고, 헌강왕릉의 내부 조사 결과
무덤 구조와 유물들이 이들이 왕으로 있었던 때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두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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