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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경주 창림사터 쌍귀부

sky_lover_ 2013. 2. 15. 10:21

- 경주 창림사터 쌍귀부

림사터에는 조금 특이한 귀부 하나가 있습니다.

이 귀부는 모서리 모를 죽인 네모꼴의 지대석 위에 거북 두 마리가 나란히 있습니다.
흔히 보는 귀부가 아닙니다. 쌍귀부입니다. 오른쪽 귀부는 이제 막 앞으로 나가려는 듯 앞발 가운데 한 발은 땅을 딛고, 다른 발은 뒤로 한껏 젖혔습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부순 듯 귀부의 머리는 떨어져 나가 없고, 남아 있는 목에는 비늘이 새겨져 있습니다. 살이 통통 오른 동글동글한 앞발과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거북의 모습이 귀엽습니다.

- 창림사터 쌍귀부

이 귀부에 있던 비는 지금 없어졌습니다.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金生, 711~791년)이 쓴 비였다고 합니다. 원나라 때의 조맹부(趙孟頫)가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 이 비에 대해 쓴 글이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 경주부에 있습니다.

이것은 당나라 시대 신라 중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로, 자획(字畫)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훨씬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디인들 재주 있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으랴?'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 창림사터 쌍귀부의 머리 부분

없어진 귀부 머리 가운데 하나는
경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용의 머리 모양을 하였고, 목을 뒤로 젖혀 거의 직각으로 들어 올린 채 입을 벌려 구슬을 물고 있는 형상입니다.

김생이 쓴 비로 말미암아 창림사터 쌍귀부를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귀부의 머리가 용의 머리 형태를 한 점으로 미루어 무장사터 귀부보다 늦은 9세기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창림사터에서 바라본 앞 들판

경주 근교에서 쌍귀부가 있는 곳이 창림사터 말고 또 어디가 있을까요?

숭복사터, 무장사터, 법광사터가 있습니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고,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린 곳입니다. 또한, 법광사도 신라 진평왕 때 세워진 그의 원당사찰(願堂寺刹)입니다.
그러니 이들 절은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창림사 역시 이 일대가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로 알려졌습니다. 그것 말고도 이곳 석탑에서 나온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를 보아도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문성왕이 855년에 이곳에 석탑을 세우면서 바라던 기원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한때 신라왕실의 도움을 받아 번성했을 창림사의 모습은 지금 모두 사라졌습니다. 절터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무심하게 펼쳐진 텅 빈 들판뿐…, 이름 모를 무덤과 깨어진 귀부와 주춧돌, 그리고 석탑만이 이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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