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조씨형제 순교자 묘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268번지... 생곡 마을 뒷산 낮은 언덕에 조씨형제 순교자 묘(曺氏兄弟殉敎者墓)가 있습니다. 이 묘는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자 조석빈과 조석증 형제의 묘입니다. 이곳 생곡(生谷) 지명은 1914년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이곳에 있던 생활리와 중곡리가 합쳐 된 것입니다.

조석빈(曺錫賓, 1825~1868)과 조석증(曺錫曾, 1834~1868) 형제는 창녕조씨(昌寧曺氏) 감무공파(監務公派) 30세손이며, 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인인 사우당(四友堂) 조이추(曺爾樞)의 6세손입니다. 초기 천주교 신자인 이들은 심한 박해 속에 가재와 전답을 몰수당하고, 문중 선산이 있는 생활리(지금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의 배정문(裵禎紋) 공의 사랑방에 자주 들러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 상자를 메고 양반 집안 등을 찾아다니며 천주학의 전교에 앞장섰습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1868년(고종 5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강동동 인근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김해 구산동 왜장대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참수 때 형 조석빈은 두 팔을 옆으로 올려 십자로 서서 미소를 지으며 목이 잘렸고, 동생 조석증은 형의 목에서 솟아오른 피를 두 손에 받아 들고 "형님의 목에 십자가의 꽃이 피었다"고 외치며 자신도 따라가겠다면서 참형으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갈대에 싸여 온 형 조석빈의 거구와 이엉에 덮여 온 동생 조석증의 왜소한 알몸은 조씨 문중의 반대로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는데, 이를 배정문 공이 자기 집 뒤 언덕 밭에 암장하였습니다. 그 후 120여 년간 배정문 공 가문에서 4대에 걸쳐 순교자 조씨형제 묘를 보호 관리하여 왔습니다.

조씨형제 순교자 묘

 

천주교 부산교구에서는 1989년 6월 19일~20일 이틀 동안 형제 묘를 발굴하였고, 출토된 유골은 부산대학교 치의학 교실에 의뢰하여 감정하였습니다.

 

1995년 1월부터 대나무를 정리하고 진입로와 터 고르기 공사 및 잔디 심기 등을 끝낸 후, 5월 29일 지금의 묘지로 성분(成墳)하여 천주교 부산교구장의 집전으로 순교자 형제 묘소 단장 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묘를 조성하고 화강암 십자가를 세운 뒤 검은 돌 비석을 만들고 주위를 성역화하였습니다.

묘비에는 '순교자 조석빈지묘(殉敎者 曺錫賓之墓)'와 '순교자 조석증지묘(殉敎者 曺錫曾之墓)'라고 적혀 있습니다.

 

- 생곡동 조씨형제 순교자 묘역의 팽나무

 

조씨형제 순교자 묘역에 노거수 팽나무가 있습니다.

 

생곡동 조씨형제 순교자 묘역의 팽나무

 

묘역은 주위 나무들로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곳 나무 중 단연 으뜸은 노거수 팽나무입니다.

 

생곡동 조씨형제 순교자 묘역의 팽나무

 

하늘을 향해 뻗은 팽나무는 녹음이 짙어갑니다.

 

생곡동 조씨형제 순교자 묘역의 팽나무

 

무성한 나뭇잎으로 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생곡동 조씨형제 순교자 묘역의 팽나무

 

아늑한 천주교 성지 조씨형제 순교자 묘역... 이곳 팽나무가 더 큰 나무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2023.6.11.)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