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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제 역사공원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 수산제 역사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 내에 수산제 수문이 있습니다.
- 안내판의 수문 사진
수산제(守山堤)는 김제 벽골제와 제천 의림지와 함께 삼한 시대 3대 저수지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산제가 삼한 시대 저수지로 알려지게 된 건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1956년에 쓴 '한국수전의 기원'이란 논문 한 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밀양에 있던 삼한 시대 소국의 이름이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입니다. '미동'(彌凍)은 '물동' 혹은 '물독'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런 나라 이름으로 수산제를 미리미동국 시대로부터 전래하는 벼농사를 위한 저수지로 추론하였습니다.
- 강 쪽 수문
수산제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 지역민들은 '안강'이라고 부르고 있음) 물이 국둔전(國屯田)으로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쌓았습니다. 양수와 배수를 위하여 자연 암반 밑으로 수문을 내었는데, 그 수문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국둔전지(國屯田地) 안의 저지대에는 주위의 산으로부터 모여든 물이 고여 자연적으로 저수지가 되었습니다. 이 물을 이용하여 제방 안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논밭에서 농사를 지었고, 저수지에서는 물고기도 잡고 연근(蓮根) 등을 채취하였습니다.
- 강 쪽 수문
수산제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저수지 둘레가 20리이며, 고려 시대 여몽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식량 확보를 목적으로 김방경이 제방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방 길이가 728보이고, 당시에 이미 제방이 무너졌지만 고쳐 쌓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점필재집(佔畢齋集)>에는 세조 13년(1467년)에 체찰사 조석문(曺錫文)이 밀양·창녕·청도·창원·대구·현풍·영산·양산·김해 등 9개 고을에서 장정을 동원하여 제방을 다시 수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밀주지(密州誌)>, <밀주구지(密州舊誌)>, <교남지(嶠南誌)> 등에도 "못의 가운데 죽도(竹島)라는 작은 섬과 오산(鰲山)이 있고, 못 안에 갖가지 풀이며 연꽃과 세모마름 등이 자생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 강 쪽 수문
문헌상으로 수산제를 삼한 시대 저수지로 입증할 사료는 없습니다. 그리고 고고학적 조사 결과도 삼한 시대 저수지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1992년 동아대박물관에서 수산제 수문을 발굴 조사했습니다. 이때 조선 후기로 추정되는 도자기 조각과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고, 함께 나온 수문 고리와 대형 나사못의 표면에 시멘트가 붙어 있었습니다. 수문이 사용된 가장 마지막 단계인 조선 시대 후기와 근현대 유물만 확인되었습니다.
- 강 쪽 수문
위 사진은 강 쪽 수문입니다. 이 수문을 보면 양수와 배수를 위하여 자연 암반 밑으로 통로를 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저수지 쪽 수문
저수지 쪽 수문 모습입니다.
- 저수지 쪽 수문
일본인들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인 1928년까지 수산제는 황토로 된 제방이 1km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방은 없어지고 저수지 일대는 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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