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그리고 단종...
- 정자각 쪽에서 올려다본 장릉
영월은 단종의 넋이 곳곳에 스며 있는 땅입니다. 귀하디귀한 몸인 단종이 외지고 궁핍한 산골에 불과한 이곳에 머문 기간은 사실 얼마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쳤고, 그리고 이곳에 묻혔습니다.
단종의 넋이 가장 선명하게 서린 곳은 장릉(莊陵)입니다. 단종이 죽어 묻힌 곳입니다. 장릉은 영월 중심지에서 서북쪽으로 다소 벗어난 곳 언덕에 있습니다. 장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력으로 폐위된 왕의 능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종의 시신은 처음엔 봉분도 없이 가매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후인 중종 11년(151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봉분을 갖추게 되었고,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이 왕의 대접을 받으면서 장릉(莊陵)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 장릉
단종이 왕위에서 폐위되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인 세조 3년(1457년) 9월에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단종 복위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영월에 유배된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렸습니다.
단종은 영월 관아인 관풍헌(觀風軒)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엎드려 울기만 하자 옆에 있던 하인이 대신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단종이 죽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습니다. 모두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곳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한밤중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가매장했습니다. 그는 시신을 묻을 곳을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시신을 묻었습니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묻은 후 가족들을 데리고 그 길로 영월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근 주민들이 엄흥도 일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관아에 고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세월이 흘러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는 공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영조 19년(1726년)에 공조참의, 순조 33년(1833년)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 금몽암
장릉 동쪽에 그다지 깊지 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골짜기 끝에 절집 같지 않은 절집이 있습니다. 금몽암(禁夢庵)입니다.
- 금몽암
절은 문무왕 20년(680년)에 의상대사가 지덕암(旨德庵)으로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 단종이 이곳 꿈을 꾼 것을 인연으로 금몽암(禁夢庵)으로 이름이 바뀌어 단종의 원찰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탔습니다. 광해군 2년(1610년)에 군수 김택룡이 증축하면서 노릉암(魯陵庵)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단종이 복위되고 보덕사가 단종의 원찰이 되자 폐쇄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조 21년(1745년) 당시 장릉을 관리하던 나삼(羅蔘)이 옛터에 암자를 다시 세우고 금몽암이라 하였습니다.
- 보덕사 극락보전
장릉 동쪽 골짜기 입구에 보덕사(報德寺)가 있습니다. 절은 신문왕 6년(686년) 의상대사가 세웠다고도 하고, 성덕왕 13년(714년)에 혜각선사(蕙覺禪師)가 세웠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절 이름은 지덕사(旨德寺)라 하였습니다.
그 후 세조 3년(1457년)에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노릉사(魯陵寺)로 바뀌었고, 숙종 31년(1705년)에 장릉을 관리하는 원찰(願刹)이 되었으며, 영조 2년(1726년)에 장릉의 제수(祭需)를 담당하는 조포사(造泡寺)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라의 덕을 갚는다는 뜻의 보덕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절의 규모가 꽤 컸으나, 한국전쟁 때 극락보전과 해우소를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지금은 꾸준히 불사를 벌여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습니다.
- 보덕사 목조삼존불
보덕사의 주불전은 극락보전입니다. 극락보전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 아미타삼존불이 있습니다.
보덕사는 발본산(鉢本山) 자락에 있는 절이지만, 터가 평지이고 마을과도 가까워 산사의 분위기와는 조금 동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서쪽 동을지산(冬乙旨山)의 일몰 풍경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절 이름은 발본산 대신에 한참 멀리 떨어진 산 이름을 따와 '태백산(太白山) 보덕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 자규루(매죽루)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청령포에서 지내다가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때 단종은 매일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밤이면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그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 자규루
단종이 관풍헌에 머물 때 이 누각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난 뒤인 그해 11월에 쌀쌀한 이곳 관풍헌 앞뜰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때 나이가 불과 17세였습니다.
자규시(子規詩)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何奈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청)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긴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하소연 어이 못 듣고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듣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