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신라시대 금관이 출토된 노서동∙노동동 고분들

sky_lover_ 2012. 1. 26. 08:37

 

- 금관총 금관(왼쪽), 금령총 금관(가운데), 서봉총 금관(오른쪽)

관은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10점밖에 없는 귀한 유물입니다. 그 가운데 8점이 우리나라 것이며, 대부분이 신라시대 금관입니다. 즉 가야시대 금관 2점을 제외한 나머지 6점이 모두 신라시대 금관입니다. 신라는 그야말로 금관의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 금관으로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금관과 교동(校洞) 폐고분(廢古墳)에서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교동 금관이 있고, 가야시대 금관으로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고령 출토 금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오쿠라(小倉) 소장품에 들어 있는 금관이 있습니다.

신라시대 금관은 모두 경주에 있는 고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해방 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노서동과 노동동에 있는 금관 출토 고분은 일제강점기 때에, 대릉원 내에 있는 금관 출토 고분은 해방 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노서동과 노동동에 있는 금관 출토 고분에 대해 알아볼까요?

 

- 금관총

먼저 금관총은
신라시대 금관이 처음으로 발견된 곳입니다. 이 고분은 노서동의 도로변에 있는데, 지금 무덤이 복원되지 않고 토담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고분은 1921년 이곳에 집을 짓기 위해 터 닦기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금관 외에도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이 왕이나 왕족으로 추정은 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덤 이름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신라시대 금관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금관총(金冠塚)이라 하였습니다.

 

- 금령총

금령총은
노동동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금관총에 이어 두 번째로 신라시대 금관이 출토되었습니다. 1924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곳에서는 금관 외에도 금제 허리띠와 장식품, 백화수피(白樺樹皮)로 만든 관모,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다량의 토기, 큰칼, 마구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국보 제91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 토기도 이곳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고분 역시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고분의 이름은 금관총이란 이름이 붙은 고분이 이미 있었으므로 금관총이란 이름은 붙이지 못하고, 이곳 금관에서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금방울 한 쌍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금령총
(金鈴塚)이라 하였습니다.

 

- 서봉총

서봉총은 노서동 고분군에 있으며, 금관총과는 불과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지금 봉분은 없고, 단지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두었습니다.

서봉총은 쌍분으로 된 고분으로, 금관총과 금령총에 이어 세 번째로 신라시대 금관이 출토되었습니다. 1926년에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 장식구, 유리제품, 토기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무덤을 발굴할 당시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금관 발굴에 참여한 기념으로 무덤 이름을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의 '서'자와 금관에 장식된 봉황(鳳凰)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