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민애왕릉의 십이지상
- 전 민애왕릉의 십이지상
전
민애왕릉에서 출토된 십이지상입니다.
이 십이지상은 전 민애왕릉의 수리공사 때(1984년) 무덤의 둘레돌을 받치고
있는 지주석 바깥을 따라서 판 작은 구덩이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들 십이지상은
쥐상, 닭상, 돼지상으로, 모두 무덤을 등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 전 민애왕릉의 십이지상
이들
십이지상은 곱돌로 만들어졌으며, 다른 무덤의
십이지상들과는 달리 앉은 자세입니다. 평복 차림에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았으며, 길게 늘어진 소매 속에 손을 감추었습니다. 그런데 돼지상에는
벽사(辟邪)의 뜻을 지닌 붉은 칠이 남아 있습니다.
- 경문왕이 죽은 민애왕을 위해 세운 비로암
삼층석탑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년)은 통일신라 말
왕위를 두고 일어났던 골육상쟁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희강왕(僖康王)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년 만에 신무왕(神武王)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이때의 일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왕은
(신무왕 측의) 김양(金陽)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의훈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김양의 군사가 다시 한
번 싸워 대승하였다. 왕의 군사 중에는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으로 도주하였다.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 전 민애왕릉
민애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는데,
장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할 당시에 민애왕의 장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 민애왕릉의 수리공사 때
무덤 주변에서 '원화십년명(元和十年銘, 815년)'이란 글자가 새겨진 뼈단지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뼈단지는 무덤이 만들어진 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815년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민애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근직 교수는 이
무덤을 애장왕릉으로 보았고, 구정동 방형분을 민애왕릉으로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