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개포동 석조관음보살좌상
- 보살상 주위의 모습
고령
개포리(開浦里)는 이름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한때는 나루터가 있었던 낙동강 가의 마을입니다.
당시 이곳은
합천, 거창, 김천, 성주, 대구 등지에 곡물과 생선, 그리고 소금을 공급하기 위한 집산지였습니다.
원래 이곳은
개산포(開山浦)로 불렸으나, 팔만대장경이 강화도에서 낙동강 이곳을 거쳐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이후로 개경포(開經浦)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경(經)'자를 빼고 개포(開浦)로 되었습니다.
- 개포동 석조관음보살좌상
개포리에 시리골(시례)이 있습니다. 골짜기의
생김새가 마치 떡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 골짜기 안으로 쑥 들어간 곳에 시례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뒷산 얕은 산자락에 돌로 만든 보살상이 하나 있습니다. 주변에 흔한 돌 가운데 평평하고 얇은 돌을 골라 그곳에 보살상을 새겼는데,
그 모습이
얄궂게 생겼습니다.
- 얼굴 부분
보살상의 모습입니다.
펑퍼짐한 얼굴에 미간은 좁아 두 눈과 눈썹이 가운데로 몰려 있습니다.
눈썹은 활처럼 휘어지며 선명하게 패여 있고, 거의 감긴 듯이 가늘고 얕은 눈은 눈두덩이 부어올랐습니다. 이마에 자리 잡은
백호는 지나치게 커서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코는 매부리코에다가 애초부터 그러한 듯 양쪽 볼보다 낮게 푹 주저앉았습니다. 그 아래 입은 어떤가요?
생기다 만 듯합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 또한 관음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 대신에 놀부영감의
정자관(程子冠)을 닮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관음보살의 상징인 화불이 간단하게 새겨져 있고, 보관 아랫부분에는 머리에 보관을 고정하기 위한 비녀가
막대기처럼 양옆으로 길게 나와 있습니다.
- 손부분과
발부분
몸은 영락없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보입니다. 비례와
균형은 아예 무시된 듯 그저 마음대로입니다.
오른팔은 뼈가 있지도 않은 듯 'U'자를 그리며 휘어져 올라가 있습니다.
왼팔은 부지깽이처럼 뻣뻣하게
내리뻗었는데, 그 끝에 달린 손 또한 굴곡이 없습니다. 가부좌한 두 발은 더욱 볼 만합니다.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치 진흙 위에 찍힌 어린애의 맨 발자국처럼 작고 갸름한 모습입니다. 어찌 보면 귀엽기조차
합니다.
- 손에 든 꽃가지
그렇다고 하여 이 보살상이 그저 못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왼손에 쥔 꽃가지는
어깨너머로 뻗었는데, 그 끝에 달린 두 송이 작은 꽃은 간지러울 정도로 앙증맞고 애교스럽습니다. 이 보살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구석을 찾는다면
바로 이 꽃송이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장인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시골 석공이 어쩌다 한껏 부려본 멋이라고나
할까요.
- 뒷면의 명문
이 보살상은 명문이 새겨져 있어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보살상 뒷면에 "雍熙二年乙酉十月卄三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옹희(雍熙) 2년 을유년은 고려 성종 4년(985년)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보살상은 985년 10월 23일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개포동
석조관음보살좌상
이 보살상은 명색이 관음보살상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자비스럽고
온화한 미소 대신에 오히려 금방이라도 비죽비죽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입니다. 보관 속의 화불과 왼손에 쥔 꽃만 아니었으면
얄궂게 생긴 모습으로 말미암아 연민의 눈으로 중생의 아픔을 바라보는 관음보살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런 보살상에 은근히 마음이
끌립니다. 어설퍼 보이는 그 모습에 오히려 정감이 갑니다. 이러니 사람의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