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양계정사
- 영천 양계정사
영천
북쪽에 높이 솟은 화산(華山)의 한 줄기가 남으로 흘러들어 대전동(大田洞)에 와서 끝이 납니다. 이 끝자락 언덕에 양계정사(暘溪精舍)가
있습니다.
양계(暘溪)는 '해 돋는 시내'라는 뜻입니다. 그 뜻에
맞게 양계정사는
고현천(古賢川)을 앞에 두고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앉았습니다.
'양계'는 정호인(鄭好仁,
1596~1654)의 호이기도 합니다. 정호인의 뜻을 기려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 후손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지은 것이 바로 양계정사입니다.
위 사진에서 왼쪽 건물은 관리사이고, 오른쪽 건물이 양계정사입니다. 관리사는 부엌, 방, 마루방이 일렬로 배치된 남쪽
지방의 민가 양식이나, 마루의 앞면을 판벽으로 막고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민 것이
특이합니다.
- 양계정사
정면에서 바라본 양계정사의 모습입니다.
양계정사는 원래 가운데 2칸 대청과
좌·우측에
온돌방을 둔 'ㅡ'자형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좌측 온돌방 뒤쪽으로 한 칸의 방과
중문간채를 증축하여 'ㄴ'자형이 되었습니다.
- 양계정사
양계정사 옆 모습입니다.
후대에 증축한
부분입니다. 한 칸의 방과 중문간채가
보입니다.
- 현판
안쪽 정면에 걸려 있는
현판입니다.
정호인은 임진왜란 때 영천 의병장을 지낸 호수(湖垂) 정세아(鄭世雅)의 손자입니다. 그는 인조 5년(16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과 호조 정랑 등을 거쳐 양산 군수와 합천 군수가 되었고, 진주 목사와 남원 도호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 양계정사
양계정사
뒤쪽의 모습입니다.
- 양계정사
양계정사 뒤뜰에서 후대에 증축된 부분과 관리사 쪽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사람과 집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요? 사람은 집을 자신이
편안하게 지낼 거처로 삼고, 그런 집을 사람은 끊임없이 돌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떠난 집은 생기를 잃고 쉽게 퇴락해갑니다. 양계정사 또한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이 그러하듯 조금씩 퇴락해가고 있습니다.
- 양계정사에서 바라본 풍경
이곳에 서서 앞을 바라봅니다.
앞쪽으로 흐르는 고현천은 예전과 변함없이 그대로 흐릅니다. 하지만 옆으로는 능선을 가로질러 28번 국도가 바싹 붙어서
지나갑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그래요. 세월이 흐른
만큼 함께 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스산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옵니다. 차갑게 스치는 바람이 적막한 주위를 잠시 흔들어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