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호젓함이 좋은 은해사 운부암

sky_lover_ 2013. 4. 3. 11:22

- 은해사 운부암

부암(雲浮庵)은 은해사의 또 다른 산내암자인 백흥암과 산등성이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이 암자는 본전인 원통전, 요사채로 쓰이는 심검당과 우의당, 그리고 정면 누각인 보화루 등으로 이루어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암자입니다.

신라 진덕여왕 때인 65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실상산문을 연 홍척국사가 창건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종잡을 수 없습니다. 16세기 초까지는 운부사
(雲浮寺)로 불렸습니다. 그 후 은해사(銀海寺)가 태실의 수호사찰로 규모가 커지면서 산내암자로 격이 낮춰진 듯합니다.

- 신일지의 반영

은해사에서 운부암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신일지라는 저수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부터 백흥암 쪽으로 가는 길과 갈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주위 풍치가 제법입니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신일지로부터 운부암까지는 계곡을 끼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비교적 평탄한 길이지만, 무척 단조롭습니다. 길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 불이문

운부암에 닿아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불이문(不二)을 만납니다. 그러나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바로 지나가지는 못하고 옆으로 둘러가야 합니다.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불이'의 진리로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면 해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보화루

불이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당당한 모습의 보화루를 만납니다.

보화루(寶華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2층 누각 건물입니다.
2층 누각은 원통전을 향한 안마당 쪽은 개방되어 있고, 정면과 측면에는 쌍여닫이 판문이 달려 있습니다. 누각 아래에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돌계단을 두었습니다.

본사인 은해사와 백흥암에도 보화루가 있습니다. 이곳에선 '보화루'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아마도 화엄학(華嚴學) 또는 <화엄경>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 보화루 편액

보화루 편액 글씨는 해관 유한익(海觀 劉漢翼, 1844~1923)이 쓴 것입니다. 요즈음 서예가의 글씨에 비해 격이 다르게 선이 굵습니다.

- 원통전

보화루를 지나면, 운부암의 중심 건물인 원통전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입니다. 철종 13년(1862년)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고 합니다.
내부에는 청동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 원통전 편액

원통전 편액 글씨는 환재 박규수(瓛齋 朴珪壽, 1807~1877)가 쓴 것입니다. 편액에 '계해년 한겨울(癸亥仲冬)'이라 적혀 있으니 그가 철종 13년(1862년)의 임술농민항쟁 때 안핵사로 임명되어 사건 실상 조사와 수습을 맡아 경상도를 오르내리던 무렵에 쓴 것인 듯합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개화파의 선봉에 섰던 인물입니다. 운부암에는 그의 글씨가 한 점 더 있습니다. 심검당에 걸린 '운부난야(雲浮蘭若)'란 글씨가 그것입니다. 원통전 편액은 단아하고 정중한 반면에 심검당의 그것은 부드럽고 넉넉하되 묵직한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 운부암 청동관음보살좌상

원통전 내에 모셔진 관음보살좌상입니다.
이 보살좌상은 1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커다란 보관과 온몸에 복잡한 영락 장식을 한 것이 눈길을 끕니다.

은해사 본사는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갈 수 있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그에 비해 운부암은 한적합니다. 그것은 이곳까지 걸어 들어가야 하는 수고가 만만치 않은 때문이겠지요. 산속 깊숙이 들어앉은 이 암자는 그 규모에서는 본사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호젓함이나 멋스러움에서는 훨씬 더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