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조선고적도보>로 우리 문화재 살펴보기(17): 청와대 석조여래좌상

sky_lover_ 2013. 2. 13. 11:42

- 청와대 석조여래좌상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7년 출판)

<조선고적도보>에 경주 남산 석조석가여래상(慶州南山石造釋迦如來像)으로 소개된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책이 출간될 당시 총독 관저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네모꼴의 상대석만 남은 불대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원래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좀 있습니다. <조선고적도보>에는 경주 남산이라 하였고, 이구열씨는 경주 유덕사터(有德寺)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둘 다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덕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있습니다. 이 절은 신라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사삿집을 내놓아 세웠습니다. 그의 먼 자손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撝)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비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면 유덕사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경주 도지동에 이거사(移車寺)라 전하는 절이 있었습니다. 이 이거사가 나중에 유덕사로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청와대 석조여래좌상 (사진 출처: 다음 카페 <한국석불문화연구회>)

이 불상은 지금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청와대 숲 속 침류각(枕流閣) 뒤의 샘터 위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습니다.

1912년에 경주를 찾은 데라우치 총독이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인 고히라 료조(小平亮三)라는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이 불상을 보았습니다. 총독이 이 불상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눈치챈 고히라가 서울 남산에 있었던 총독 관저로 이 불상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되어 이 불상은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로 가게 되었습니다. 1939년에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옮기자 불상도 같이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불상은 구중궁궐과도 같은 곳에 갇혀있다가 보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혔습니다. 그러다가 이 불상의 존재가 잠시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1994년 때입니다.

당시 구포역 열차전복사건,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 서해페리호 침몰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과 같은 대형참사가 잇달아 일어나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경내의 불상을 치워버린 것이 원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그러자 청와대는 고심 끝에 그 해 10월 27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불상이 제자리에 있음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 청와대 석조여래좌상 (사진 출처: 다음 블로그 <토함산 솔이파리>)

이 불상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같이
당당한 모습을 하였습니다.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풍만하고, 눈은 약간 아래로 내려보고 있습니다. 이마에 백호가 있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으며, 코는 원만하고, 두툼한 입술은 굳게 다물었습니다. 목에는 삼도가 있습니다. 자세는 결가부좌를 하였고,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였습니다. 법의는 우측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을 하였는데, 옷 주름을 소매 끝과 발목까지 표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