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원주 흥법사터

sky_lover_ 2011. 11. 17. 07:59

- 원주 흥법사터

원도 원주 일원에는 약 100여 개의 절터가 있다고 전합니다. 그 가운데 흥법사터는 영봉산(靈鳳山, 403m)에서 흘러내린 작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 앞쪽으로는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과 문막읍이 내려다보입니다. 이곳 절터 대부분은 논밭으로 변했고,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 흥법사터의 옛 모습

흥법사(興法寺)의 창건이나 중창, 그리고 폐사 시기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흥법사 부도비가 진공대사비(眞空大師碑)이며,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세워졌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흥법사 부도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으니, 절은 이미 통일신라 말에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동국여지승람> 권46 원주목(原州牧) 불우조(佛宇條)에 "흥법사는 건등산(建登山)에 있다. 절에 고비(古碑)가 있는데, 고려 태조가 친히 글을 짓고 최광윤에게 명하여 당 태종(唐太宗)의 글씨를 모아서 모각(模刻)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책이 편찬되었던 조선 성종 11년(1480년)경까지는 절과 비가 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조 3년(177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영조 대(1724~1776년)에 신경준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가람고(伽藍考)>의 기록에 진공대사의 탑비가 두 토막이 나 있었고 흥법사도 폐사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흥법사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 흥법사터

절터 앞쪽으로 가운데에 돌출부가 있는 높이 약 3m, 길이 약 60m의 돌로 쌓은 축대가 남아 있습니다. 그 너머로 일부가 보이는 탑이 흥법사터 삼층석탑입니다.

- 흥법사터

1929년 오가와 게이기찌(小川敬吉)는 <흥법사지 현황조사 복명서(興法寺址 現況調査 復命書)>에서 탑 뒤쪽으로 금당지(金堂址)가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 절터에 남은 석등 받침돌

흥법사는 큰 규모의 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진공대사가 왕사(王師)로 활약하던 고려 초에는 고려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진공대사가 봉림산파에 속했던 사실로 미루어보면 선종 계통의 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경에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염거화상탑과 그리고 진공대사탑이 일본인 곤도의 주도로 서울로 밀반출되었고,
다시 1934년에 총독부박물관의 뒤뜰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그리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 진공대사탑비가 있습니다.

- 흥법사터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 869~940)은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동한 스님으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오자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습니다. 고려 태조는 대사를 왕사로 임명하여 극진히 예우하였고, 흥법사를 중건하여 여기에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흥법사엔 선 수행을 하려고 찾아오는 스님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절터에는 탑과 부도비와 같은 몇몇 흔적만이 겨우 남았을 뿐 거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무(無)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말해주듯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