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보경사 원진국사비

sky_lover_ 2012. 9. 29. 11:24

- 보경사 원진국사비

경사 경내 뒤쪽에 팔상전, 산령각, 원진각, 영산전, 명부전이 사이좋게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 앞마당 한쪽에 비각이 있고, 이 비각에 비석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입니다.

원진국사(圓眞國師, 1171~1221) 속성이 신(申)씨이며, 자는 영회(永廻), 법명은 승형(承逈)입니다. 13살 때 희양산 봉암사 동순(洞純) 스님을 은사로 하여 승려가 되었고, 금산사 계단(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으며, 1197년 선과(禪科)에 상상품(上上品)으로 합격했습니다. 그 후 지눌 스님으로부터 불법을 배웠고, 고려 고종 2년(1215년)에 대선사(大禪師)로 임명되어 보경사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능엄경>에 능했으며, 1221년 8월에 팔공산 염불사(현재 동화사 염불암)에서 세상을 떠난 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습니다.

- 원진국사비

원진국사비원진국사가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난 고려 고종 11년(1224년)에 세워졌습니다.

비는 귀부 위로 비신(碑身)을 세운 간결한 모습인데, 비신은 청석을 깎아 만들었습니다. 크기는 높이 1.83m, 너비 1.04m, 두께 17cm입니다. 비머리가 없이 비신의 위쪽 양 끝을 귀접이한 것과 둘레에 섬세한 당초무늬가 띠처럼 돌려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양식의 하나입니다.

- 귀부

이제 귀부부터 한 번 살펴볼까요?

귀부와 받침돌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귀부는 목을 앞으로 뽑아 크게 벌린 입에 여의주를 물고 눈을 크게 치떠 한껏 위세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섬약한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비가 만들어진 시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문화는 그 시대의 역량을 반영하기 마련이니까요.

- '왕'(王)자가 새겨진 귀갑문

비좌(碑座)에는
가늘고 긴 연꽃잎을 사방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단조로워 그런대로 체면치레하는 수준에 머뭅니다. 6각형의 귀갑문에는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겼습니다. 이것은 국사였던 비의 주인에 대한 예우로 보입니다.

- 비신의 제액

비신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이라고 가로로 쓴 해서체의 제액을 음각하였습니다.

비문은 "고려국 보경사주지 대선사(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
증시원진국사 비명 병서(贈諡圓眞國師碑銘幷序)"로 시작됩니다. 글씨는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활달함을 보입니다.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李公老)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교칙(敎勅)에 의해 썼습니다.

- 귀부 머리와 발

귀부는 왠지 듬직함이나 힘이 모자라 보입니다.

이런 느낌은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귀부의 발이 유난히 왜소하여 더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성기의 귀부에서는 땅을 딛고 있는 발의 모습만 보아도 그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에선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여의주를 입에 문 채 앞을 바라보는 귀부의 머리에서 마지막 남은 힘의 한 조각을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