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
- 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
예전에 지방에서 조곡(租穀)과 공물(貢物) 등을 뱃길을 통해 서울로 운송하던 것을 조운(漕運)이라
했습니다.
삼랑진은 낙동강 가에 있습니다. 이곳은 낙동강을 통한 뱃길 수송에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운을 담당한 곳 역시 이곳에 있었습니다. 삼랑진 후조창(後漕倉)이
그것입니다.
- 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
조운은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조운을 통해
수송될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조창(漕倉)이 있었고, 이곳에선 조운 외에도 조세를 징수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삼랑진 후조창의 조창을 통창(統倉)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육로가 발달하면서 뱃길을 통한 운반이 줄어들면서 삼랑진 후조창도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이곳 마을 뒤편 고갯마루에 조창에 관계했던 관원들의 비만 8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비들을 '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이라 합니다.
이 비들은 영조 42년(1766년)부터
고종 9년(1872년)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동안
세워졌습니다. 이때가 삼랑진 후조창의 전성기로 볼 수 있습니다 .
- 부사 김인대 대유애비(왼쪽)와 관찰사 조상국인영 조운정 영세불망비(오른쪽)
이 비들
가운데 '부사 김인대 대유애비'와 '조상국인영 조운정 영세불망비'를 한 번
살펴볼까요?
영조 42년(1766년)에 삼랑진에 후조창(後漕倉)인 삼랑창(三浪倉)을 증설하면서 창원의 좌조창(左漕倉)과 진주의
우조창(右漕倉)과 함께 삼조창(三漕倉)이 되었습니다. 이때 밀양부사가 김인대였습니다.
삼랑창은 운반선 15척으로
밀양, 양산, 현풍, 창녕, 영산, 울산, 동래 등 인근 7개 군현의 조세를 징수하였습니다. 부사 김인대 대유애비(府使 金仁大 大遺愛碑)는 그런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관찰사 조상국인영 조운정 영세불망비(觀察使 趙相國寅永 漕運正 永世不忘碑)는 헌종 때 4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운석
조인영(1782 ~ 1850)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당시 조창에 이바지한 공적을 기려 세운 것입니다. 이 비는 헌종 9년(1843년)에 세운
것으로, 철로 만들어져 부식이 심합니다.
- 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
삼랑진 후조창은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이어져 내려오다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1945년 광복 직후까지도 창고 등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민가가 들어섰습니다. 지금도 '조창산등이', '지점거리', '선청'(船廳), '통창골(統倉골)'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 '당매대'(棠梅臺)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
이곳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 '당매대'(棠梅臺)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이 글자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당'(棠)은 아가위 즉 산사(山楂)를 뜻하고, '매'(梅)는 매화를 뜻합니다. 형제간의 우의가 좋은 것을 노래한
것으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당체시(棠棣詩)가 있습니다.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棠棣之華(당체지화) 鄂不韡韡(악불위위) 아가위꽃 그 꽃송이 울긋불긋
아름답네.
凡今之人(범금지인) 莫如兄弟(막여형제) 오늘의 모든 사람 중에 형제보다 좋은 건 없네.
바로
옆에 여흥 민씨의 재사(齋舍)인 오우정(五友亭)이 있습니다. 오우정은 여흥 민씨 다섯
형제가 한 베개와 밥상으로 침식을 함께하며 학문을 닦고 산수를 즐기려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매대'(棠梅臺)란 이 글자도 형제간의 우의를 기려 새긴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