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창원 제말 장군 묘

sky_lover_ 2021. 3. 30. 12:12

- 제말 장군 묘에서 바라본 다구마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지명이 좀 독특한 다구리(多求里)가 있습니다.

 

다구리의 '다구'는 구지(곶)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이곳에선 하구지라고도 합니다. 이곳 다구(多求)마을은 바닷가에 있습니다. 앞바다에 죽도가 있고, 마을은 논밭을 등 뒤로 둔 채 해안을 향해 몸을 낮게 엎드려 있습니다.

 

- 제말 장군 묘

 

다구마을 뒤편 산 능선을 따라 1002번 지방도로가 구불구불하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도로 바로 위쪽에 제말(諸沫) 장군의 무덤이 있습니다.

제말(諸沫, ?~1593)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그는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문경 등에서 대승을 거둬 선조 26년(1593)에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주 전투에서 왜적을 토벌하다 그해에 전사하였습니다.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 내륙에는 곽재우(郭再祐), 제말(諸沫)이라 하였습니다. 장군은 날아다니듯 빠르다 하여 '비(飛)장군'이라 불리었으며, 왜적도 장군을 두려워하여 싸우기를 피했다고 합니다.

그는 정조 16년(1792)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綠)과 함께 나라에 충성하였다 하여 쌍충사적(雙忠史蹟)에 기록되었고, 성주와 진주에 쌍충각(雙忠閣)이 세워졌습니다. 순조 12년(1812)에 장군의 충의에 비해 그에 대한 예우가 미약함을 애석히 여겨 그의 공이 천추에 빛나도록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가 다시 내려졌습니다.

 

- 망주석

 

무덤 양옆에 망주석이 있고...

 

- 제말 장군 묘

 

묘비와 상석, 그리고 향로석 등이 있습니다.

 

- 묘비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유명조선국선무공신(有名朝鮮國宣武功臣)

증자헌대부병조판서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兵曹判書知義禁府事)

행성주목사 시충장제공지묘(行星州牧使 諡忠壯諸公之墓)

- 향로석

 

향로석에는 개 다리와 같이 생긴 발과 안상무늬가 앙증맞게 새겨져 있습니다.

 

- 제말 장군 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제말 장군의 행적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성주 선생안(先生案)에 제말(諸沫)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고성(固城)의 상(常)사람이었다. 임진란을 당하여 창졸간에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공격하였는데, 향하는 곳에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곽재우와 같이 일컬었으나 명성은 오히려 그보다 높았다. 조정에서 특별히 성주목사를 제수하였으나 오래지 않아서 죽고, 공명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또 소문에는 적군과 진을 마주쳐서 교전할 적에는 용기가 늠름하고 수염이 모두 위로 뻗쳐서 흡사 고슴도치 털이 뻗친 것과 같았으므로 적군들이 바라보고서 호랑이 같이 두려워하였다.

 

성주군에 '제말 장군의 현몽'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합니다.

조선 영조 13년(1737) 정월 17일 밤 찰방(察訪) 행은(杏隱) 정석유(鄭錫儒)가 지이헌에 올라가 거닐다가 잠들었는데 꿈에 관복을 입은 거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성주목사로 있던 제말이요. 본래 고성 사람인데 임진란 당시 경상도 일대에는 수령 방백들이 치열한 싸움에 혹은 전사하고 혹은 직책을 버리고 도망하여 왜군들이 무인지경같이 쳐 올라올 때 나는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서 곽재우 장군과 합심하여 웅천, 의령, 김해, 현풍, 문경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성주에 이르러 치안을 확보하던 중 성주목사가 되어 죽은 사람이오. 그 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 이름이 없어지고 사기(史記)에도 빠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탄식할 노릇이 아니겠소. 후일 통제사가 된 정기룡 등도 다 나의 막하(幕下)에 있었던 사람이오" 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저 산은 구름 따라 한없이 뻗어가고/ 아늑한 하늘가 달도 외로운데/ 적막한 성산관(星山館)에/ 의지할 곳 없는 이내 혼백/ 

또 말하기를 "내 무덤이 칠원 땅에 있는데 자손이 없어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잡초 속에서 허물어져 가고 있소" 하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튿날 행은은 간밤의 일을 성주목사 홍응용에게 말하여 전관 명부를 찾아보니 제말의 이름은 있으나 그 거처가 적혀있지 않고 임진왜란 당시의 전공 사실도 적혀있지 않았다. 목사는 곧 이 사실을 경상감사 정익하에게 보고하였다. 정 감사는 재조사해본 결과 그 사실이 정확함을 알고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이동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날 때 다만 칠원군수에게 공문을 보내어 제말의 무덤을 개축 수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칠원군수 어사적이 낮잠을 자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관복을 입은 이가 나타나서 "나의 무덤이 어느 산속에 어떤 좌향으로 있으니 잘 알아서 하시오" 하기에 놀라 꿈을 깨었다. 어 군수는 이상히 여기던 중 그날 저녁에 감영에서 감사의 공문을 보고 꿈과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무덤을 찾아보니 오랫동안 방치한 탓으로 무덤의 형상은 남아 있으나 잡초만 우거져 있는 것을 잘 수축하여 제사를 올려 혼백을 위로하고 묘지기를 두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제말 장군 묘에서 바라본 전경

 

무덤은 바다를 향해 남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 좋습니다.

 

- 제말 장군 묘에서 바라본 전경

 

제말 장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왜적에 맞서 싸웠지만, 그의 공에 비해 이름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원히 잠든 이곳 자리만은 남 부러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