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밀양 강동구와 오봉서원

sky_lover_ 2021. 1. 19. 06:53

- 강동구와 비각

 

밀양시 초동면 오방마을 밖 도롯가에 흙으로 쌓은 작은 둔덕이 있습니다. '강동구'(江東邱)라고 부르는 둔덕입니다.

 

- 강동구와 비각

 

이 둔덕은 취원당(聚遠堂) 조광익(曺光益, 1537~1578)과 아우인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의 우애를 기려 뒷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게 조성되었습니다. 둔덕 이름의 '강동'(江東)은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강동구

 

강동구 모습입니다.

 

선조 8년(1575년)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積)을 정리할 때 조호익에게 군적에 올랐으면서도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를 색출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喪)을 핑계로 거절하자 불량 토호로 몰아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에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에 조광익은 선조 11년(1578년)에 강동(江東)에 있는 아우를 만나려고 평안도부사(平安道府使)의 직책을 얻어 갔다가 이내 병을 얻어 그곳에서 42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시신을 이곳 오방리로 옮겨와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때 강동의 많은 백성이 형제의 우의에 감복하여 흙을 짊어지고 조문하러 천릿길을 왔으나 이미 장사를 지낸 후이므로 가지고 온 흙으로 둔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강동구(江東邱)라 하였습니다. 선조(宣祖)는 그 우애를 가상히 여겨 정문(旌門)을 내려 표창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싣도록 하였습니다.

 

- 비각

 

강동구 비각입니다. 비각은 1834년에 후손들이 세웠습니다.

 

- 비

 

비각 내의 강동구 비입니다. 비의 전액(篆額)은 '강동구'(江東邱)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강동구

 

비각 맞은편에 강동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 강동구

 

이 강동구는 꼭대기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붉게 배롱나무꽃이 필 때면 지금과는 느낌이 다를 것 같습니다.

 

- 강동구

 

강동구는 작은 둔덕이라기보다는 무덤처럼 보입니다.

 

- 강동구

 

 '강동구'(江東邱)라 새겨진 표석이 아니라면...

 

- 강동구

 

 그저 무덤 등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 오봉서원

 

강동구 조금 위쪽에 오봉서원(五峰書院)이 있습니다. 조광익과 그의 증조부(曾祖父) 조치우를 모신 서원입니다.

조광익의 향사(享祀)는 정조 5년(1780년)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올렸습니다. 정조 14년(1790년)에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그의 증조부 조치우(曺致虞)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고, 그다음 해 함께 향사를 올리라는 윤허가 내려졌습니다. 정조 19년(1795년)에 밀양 사림들의 공의(公議)로 향사할 뜻을 태학(太學)에 통문(通文)하여, 청효사(淸孝祠)라 현액(懸額)하고 봄가을로 향사하라는 답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해에 격을 높여 오봉서원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습니다.

 

- 오봉서원

 

그 후 후손들의 재숙(齋宿)을 위한 재실을 세워 오봉서당이라 하였습니다. 1988년에 청효사를 다시 세워 그 전의 현판을 다시 붙이고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하였습니다. 1989년에 오봉서원을 복원하였습니다.

 

- 숭유문

 

1997년에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날의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였습니다.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實學堂)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었으며,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 하였습니다.

 

- 조광익 묘

 

오봉서원 뒤쪽 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조광익의 무덤이 있습니다.

 

조광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창원시 북면 지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자(字)는 가회(可晦), 호(號)는 취원당(聚遠堂)이며, 증조부는 중종 때의 청백리인 조치우(曺致虞), 아버지는 조윤신(曺允愼),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장말손의 손녀입니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명종 13년(1558년)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의금부도사(義琴府都事)에 이르렀습니다.

 

- 묘비

 

조광익 묘비입니다.

 

- 석상

 

조광익 묘 앞의 석상입니다.

 

- 망주석

 

망주석입니다.

 

- 조광익 묘역

 

위 사진에서 앞쪽은 조광익의 아들 조이복(趙以復)의 무덤이고, 그 뒤쪽이 조광익의 무덤입니다.

 

- 조광익 묘에서 내려다본 오봉서원

 

조광익의 무덤에서 오봉서원이 바로 내려다보입니다.

 

- 조광익 묘에서 내려다본 오방마을

 

오봉서원 너머에 오방(五榜)마을이 있습니다. 오방(五榜)이란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옛날 이 마을의 박씨 가문에 5형제가 한꺼번에 과거에 급제(及第)하였습니다. 그 영광을 기리기 위해 5형제의 '오'(五)자를 따고, 동방(同榜: 같은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함께 적히던 일. 또는 그런 사람)의 '방'(榜)자를 따서, '오방'(五榜)이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체적 사실에 대해서는 문헌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