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경주 헌덕왕릉

sky_lover_ 2020. 8. 5. 06:55

- 경주 헌덕왕릉

 

경주 북천(北川)은 황룡동 황룡골에서 발원해 암곡동의 물을 합쳐서 덕동호와 보문호에서 머물다 경주 시내 북쪽을 휘둘러 흐른 뒤 형산강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북천이 소금강산 남쪽 자락을 지나가는 천(川)가에 신라 왕릉이 있습니다. 헌덕왕릉(憲德王陵)입니다.

- 소나무숲

 

헌덕왕릉을 찾으면 능 앞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먼저 반갑게 맞아줍니다.

 

- 헌덕왕릉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년∼826년)은 신라 제41대 왕입니다. 본명은 김언승(金彦昇)이며, 소성왕(昭聖王)의 친동생입니다. 그는 소성왕의 아들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신라 왕실 내에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 정세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신라 왕릉으로서는 꽤 호화롭게 조성되었습니다. 이것은 헌덕왕을 뒤이어 왕위에 오른 흥덕왕이 바로 자신의 동생이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흥덕왕릉도 헌덕왕릉처럼 호화롭습니다.

 

- 헌덕왕릉

 

능은 흙으로 쌓은 둥근 봉토분입니다.

 

능에는 봉분 밑의 둘레를 따라 호석(護石)이 배치되었고, 호석에는 십이지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호석 밖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설치한 난간이 있습니다. 난간 기둥에는 상 ·하에 구멍이 있어,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두 개씩의 관석(貫石)을 끼웠는데, 이는 다른 왕릉과 같은 형식입니다.

 

- 헌덕왕릉

 

지금 헌덕왕릉에는 상석도 없고, 문인석과 무인석, 돌사자상 등도 없습니다. 하지만 흥덕왕릉의 예를 보면, 원래는 이런 것들이 모두 있었을 것입니다.

 

- 석인상(경주고등학교)과 돌사자상(분황사 모전석탑)

 

지금은 북천 상류에 덕동호와 보문호가 있어 북천이 범람하는 일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북천이 가끔 범람했습니다. 이런 범람으로 문인석, 무인석, 돌사자상 등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부 사람은 지금 경주고등학교 교내에 있는 석인상과 분황사탑 서편 기단부에 남북으로 있는 돌사자상이 원래는 헌덕왕릉에 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쥐

 

조선 영조 18년(1742년) 8월 22일에 경주에 태풍과 비가 몰아쳐 북천이 범람하여 헌덕왕릉이 무너졌습니다. 이때 십이지상 가운데 일부가 유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9월에 영조에게 사실을 아뢰자 관찰사에게 향축(香祝)을 보내어 수축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십이지상 가운데 일곱 십이지상이 없어지고, 쥐, 소, 범, 토끼, 돼지, 이렇게 다섯 십이지상만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십이지상은 북천과 거리가 상대적으로 먼 쪽에 있는 십이지상들입니다. 십이지상은 평복으로, 조각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 소

 

소입니다. 이끼가 끼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 호랑이

 

호랑이입니다. 역시 이끼가 끼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 토끼

 

토끼입니다. 역시 이끼가 끼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 돼지

 

돼지입니다. 조각 솜씨가 다소 거칩니다. 하지만 이끼가 덜 끼어 있습니다. 덕분에 비교적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습니다.

 

- 헌덕왕릉

 

여름 햇볕은 몹시 따갑습니다. 이 햇볕 덕분에 봉분에는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 헌덕왕릉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왕(헌덕왕)이 돌아가시니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천림사는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요?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동천(東川: 현재 동천동 지역의 북천)가에 '오리(五里)숲'이 있었다고 합니다. 숲은 이름 그대로 5리에 걸쳐 뻗쳤다고 합니다. 이 숲은 알천(閼川: 북천)의 수해 방지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숲은 보문호 밑 '숲머리'라는 마을에서 알천을 따라 분황사가 있는 곳까지 뻗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헌덕왕릉에서 남동쪽으로 300m 떨어진 북천 제방과 하천 일대에 임천사지(林泉寺址)로 전하는 절터가 있습니다. 임천사(林泉寺)는 천림사(泉林寺)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기도 합니다. 지금의 헌덕왕릉은 대체로 실제 헌덕왕의 능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임천사지로 전하는 그곳이 바로 천림사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