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 월출산
강진 무위사(無爲寺)를 찾아가는 날 날씨도 차고 황사와 미세먼지까지 심술을 부리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갈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두근두근하며 설렙니다.
무위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월하마을, 그곳 들판 너머로 보이는 월출산은 이러한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 강진 무위사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할 만큼 오래전에 찾았던 무위사는 담장도 없는 그런 곳... 인위적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 후 꽤 긴 시간이 흐른 후... 지금의 무위사는 어떤 모습일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찾아갑니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으니 무위사만 홀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지만 절 입구부터 내가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섭니다. 넓은 주차장과 담장이 생겼고, 일주문과 보제루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 극락보전 앞마당
극락보전 앞마당에 들어서면 괘불대와 배례석, 그리고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 배례석
배례석에는 연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들지 않고 이곳에 피어 있습니다.
- 삼층석탑
탑은 작고 단정합니다.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에는 작고 소담스러운 무위사와 참 잘 어울렸는데, 지금은 조금 왜소해 보입니다.
- 기단부
네모반듯한 지대석의 2단 받침 위에 하층기단이 올려져 있고, 그 면석에 참한 안상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눈길이 잠시 머뭅니다.
- 탑신부
탑신부입니다. 신라 석탑 양식을 이어받아 단정합니다.
- 삼층석탑
탑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습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 선각대사 부도비
절 마당 한쪽 모퉁이에 선각대사 부도비가 있습니다.
- 선각대사 부도비
부도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입니다.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는 신라 말기의 스님입니다. 그는 보조선사 체징의 제자로 지내다가 보조선사가 세상을 떠난 뒤 당나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905년 귀국하여 무위사에 머물렀습니다. 왕건과 긴밀한 관계였던 그는 경명왕 1년(917년)에 궁예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부도비는 그가 죽은 지 29년만인 고려 정종 1년(946년)에 세워졌습니다.
- 귀부
귀부는 사나운 모습을 하였습니다. 머리는 용의 모습으로 정수리에 뿔이 있고 입에 여의주를 물었습니다.
- 귀부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합니다.
- 귀부
등에는 6각의 귀갑문이 질서 있게 배치되었고, 그 가운데에 비좌가 있습니다. 비좌 앞뒤 면에 구름무늬가, 양옆 면에 안상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 비신과 이수
비제(碑題)는 '고려국 고 무위갑사 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률(柳勳律)이 해서체로 썼습니다.
이수 가운데에 네모꼴의 전액(篆額)이 있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 없습니다. 그 주위를 운룡문(雲龍文)과 쌍룡문(雙龍文)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 미륵전
극락보전에서 조금 비켜선 곳에 미륵전이 있습니다.
- 석불
미륵전에는 아줌마 머리를 한 석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인근 수양리 수암마을에 버려져 있던 것을 어느 독지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석불은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입술이 두껍습니다. 영락없이 시골 아주머니 모습입니다.
- 극락보전
무위사의 백미는 극락보전입니다.
건물은 세종 12년(1430년)에 지어졌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에 배흘림기둥을 한 맞배지붕 주심포집입니다. 건물 내에는 조선 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아미타삼존불과 아미타삼존도, 그리고 수월관음도가 있습니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싶었으나, 절에서 허락하지 않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 현판
극락보전 현판입니다.
- 문살
극락보전의 문살입니다. 격자 빗살 무늬입니다.
- 극락보전
극락보전 옆 모습입니다.
무위사는 이제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절이 아닙니다. 여느 절집처럼 번잡스러움이 곳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오래전 소박하고 한적한, 그 자연스러움에서 느꼈던 아름다움을 이제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